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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의 사유

구 기 수 I 미술비평

 

 

‘푸른 하늘과 차가운 회색의 인공물 사이, 우리에게 친근하며 때론 낯선 이미지의 사물이 놓여, 누군가의 이야기를 잔잔한 시선으로 전하고 있다.’

 

우리 눈앞에 등장한 몇몇 이미지의 구성이 이루어진 공간은, 지극히 평범해 보이지만 실상 내용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며 접근한다면, 그리 밝고 유쾌한 장면이 아님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미혜의 시각적 사유의 언어는, ‘삶과 죽음’에 대한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경계를 거리를 두고 2차원의 화면에, 담담하면서도 경건한 태도로 이야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죽을 것을 기억하라.”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기원함을 찾아 볼 수 있다. 이 메멘토 모리를 대표하는 한 예화로, 원정에서 승리를 하고 돌아온 장군이 개선 행진 중, 노예들에게 명령하여 “오늘의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우쭐하지 말라! 너희는 삶이 다하면 죽음을 맞이 할 것이다. 그러니 오직 겸손으로 행하라!”라고 소리지르게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편, 나바호족의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을 들 수 있다. “네가 이 곳 세상에 태어났을 때, 너는 울었지만 세상은 기뻐했다. 그러나 네가 세상을 떠날 때, 사람들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도록 삶을 살아라!” 그들은 ‘탄생과 죽음’의 의미와 가치 측면에서, 3인칭 시점에서의 의미와 자아가 겪고 지나 온, 삶의 여정에 대한 가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성경의 전도서에서는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Vanitas Vanitatum omnia Vanitas”) 세상에서의 삶의 가치가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렸을 지라도, 그것은 영원한 시간 속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부재 속에서 더욱 그러함을 직시하도록 지적한다. 이렇듯 다양한 형태의 사상과 철학 그리고 성경의 진리는, 우리에게 삶과 죽음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받아들이도록 권면하고 있다!

 

이미혜는 자신이 구축한 이미지의 구성 공간에, ‘삶’을 재인식 하는 자세와 ‘죽음’을 대하는 새로운 시각적 사유의 개념을 호출하여 소개하고 있다. 즉 자아의 욕망에 대한 해방의 영역이자 감상자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내 외부적인 사유와 치유의 장으로 그녀는 선정하고 있다. 그녀가 전달하고 싶어하는 ‘시각적 해방과 치유’의 공간과 영역으로 유도하기 위해, 이미혜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또는 주인을 잃은 사물의 이미지를 그녀의 화면에 호출해 왔다.

 

 

이 평범하고 익숙한 정물들에게 시각적 사유의 호흡을 불어넣기 위해, 그녀는 16-17세기 바로크 시대 유행했던 정물화의 미쟝센 즉 ‘바니타스’(Vanitas)적 상징을 불러와, 자신의 시각적 언어로 제시하고 있다. 바니타스화의 특징은, 죽음을 말하는 ‘해골’, 부패를 보여주는 ‘썩은 과일들’, 인생의 짧음을 의미하는 ‘거품, 연기, 모래시계’ 등의 소재를 통하여 상징화되고 있다.

 

이 상징적 요소들을 빌어 이미혜는, 시공간을 뛰어넘는 모더니티의 해석을 그녀의 화면에 호출해 왔다. 더불어 그녀의 공간은 연대기적 시간 안에서 잠시 있다 사라져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된 소재와 표현의 동기로 장면을 잔잔하게 연출한다. 이미혜는 “개인의 삶과 죽음은 끊임없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스스로는 죽음이라는 것이 나의 일이 아닌 것처럼 느끼며 살아간다.”라고 말한다. 이 뜻에서 우리가 알 수 있듯이, 그녀는 주변에서 사라져가는 모든 이들에 대한 죽음을, 경이롭게 사유하고 직시하기를 역설하고 있다…

 

여기 이미혜의 작품 “상복동 591”에서, 우리는 그녀의 참회적이고 명상적인 분위기를 인식하고 느낄 수 있게 된다. 이름 모를 이의 분골이 보관된, 석조의 형태와 그녀의 작업에서 반복적으로 재생되고 있는 흐린 구름이 있는 하늘. 그리고 이 둘 간의 정적을 흡수하며 불편함을 완화해주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인의 애장품과 말라 비틀어진 낙엽 그리고 민들레의 홀씨. 이런 일상의 소재들이 정적으로 놓여있다. 그녀의 작품의 주된 제목이 된 “상복동 591”은, 죽은 이의 육을 태우고 모은 분골을 모신 납골당이 있는 장소이다!

 

그녀가 그린 그림 속 납골당은 누군가의 죽음이지만, 이미혜의 작품을 보는 순간 우리는 미묘하게 혼란스러운 감정과 여운에 휩싸이게 된다… 그녀의 작품에 등장하는 납골당은 이 세상을 떠난 이의 분골을 소유하고 있지 않는다. 그저 세상을 떠난 이가 남긴 또는 이제 갈 곳 없이 주인을 잃은 물건이, ‘개인적인 신화의 역사’를 간직한 차가운 석조 기념비 위에 그렇게 놓여있을 뿐이다.

 

그녀의 작품 속 이미지를 보는 우리는, 모든 생각이 침묵하며 저 미지의 영역과 장소 속에서 무한히 침잠한다. 어느 누군가의 죽음의 기념비 위 모래시계는,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 기능이 정지되어있는 듯 하다. 다시 그 앞에 서서, 우리는 이 정적을 깨어줄 무언가를 다시 말해야 할지 머뭇거리지만, 이내 침묵하게된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 장면에서 우리는 ‘메멘토 모리’를 잠시 생각한다…

 

삶의 끝 이후를 우리는 알 수 없기에 이내 포기하고 일상으로 돌아와, 조금 전에 했던 혼란스러운 생각들을 지우고 다시 반복적인 일상으로 스며든다. 어쩌면 그 결말을 애써 외면하고 회피하고 싶어서일까? 이미혜는 그녀가 소개한 이미지에서, 우리에게 죽음이 결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과 항상 공존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죽음을 사유하고 대면하라! 그것이 결코 두렵고 무서운 사실이 아닐진데, 그대는 왜 기피하고 도망하는가?’라고 이미혜의 이미지는 소리치듯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지금 이 순간 저 세상 끝 멀리서 브람스의 ‘Alto Rhapsody Op.53‘이 들려온다…‘ 죽음은 삶과 항상 공존하지 않았었던가!, 우리는 무엇을 이곳에서 기대하며 꿈을 꾸고있는가?, 지금 고개를 숙이고 돌아가는 검은 그림자는 태양이 두렵지 않다!’.

 

또 다른 그녀의 설치 작업에서, 더욱 충격적인 ‘사실의 실체’를 우리는 목도하게된다. 그것은우리의 삶이 아주 간단하게 ‘종이 한장’의 사망 신고서로 정리되는 장면이다. 그녀의 작품 앞에 서 있는 동안, 우리는 매우 불쾌함과 우울함 그리고 흔들리는 내면의 감정만이 무질서하게 교차하고 있다. 곧 이 무례한 종이 안의 글들은, 우리를 조용히 제압하며 그 앞에 순응시킨다…

 

그 삶과 죽음의 결정 된 힘에 우리는 끊임없이 저항하고 대항하지만, 그 압도적이며 조용한 신의 힘 앞에 우리는 할 말을 잃게 된다… 신 앞에 서는 우리 인생이 그 어떤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지금 이미혜의 시각적 이미지가 구성 된 화면과 설치 앞에 서있다기 보다는, 죽음 이후의 심판의 과정을 유추하게 이끌고 있는 예언서 앞에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누구도 이 심판의 법정 앞에서 면죄부를 받을 수 없다! 이미혜의 시각적 메시지는 표면적으로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일상적이다. 그러나 한번 대면하고 곧 이어지는 생각의 귀결은, 그리 가볍거나 일반적인 사유의 장이 될 수 없음을, 우리는 마음의 깊은 곳에서 출발한 고백을 입술로 말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이미혜의 시각적 언어가, 작가 자신에게는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게 해방시키고자 하는 ‘입구이자 출구인 시각적 공간’일 것이다. 다른 누군가에게는 이 땅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하고 지우는 ‘치유의 공간’일 수도 있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명제’가 될 수 있다.

 

이처럼 작가 이미혜는, 우리의 ‘삶과 죽음’에 대한 사유를 단편적이지만 서사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무엇을 위해 우리는 이 땅의 흙을 발에 묻히며, 코에 호흡을 가지고 살아가는가? 실제로 우리가 그녀의 작품과 마주하노라면, 마음 속에서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깊은 상심’, ‘고독한 영혼’ 그리고 ‘구원에 대한 고민’. 이 모든 것이 그녀의 작품 안에 가득하다! 이제 이미혜의 작품에서 우리는 멀리 떠나있다. 그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채, 일상으로 돌아 온 우리는, 또 그렇게 삶을 반복적으로 살아가야 한다!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경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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